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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반 고흐 진품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리버드 예약은 이미 마감되었고,
관람객이 몰려 혼잡하고 입장 대기 시간도 많이 걸렸다는 불만 가득한 정보도 접했지만,
꼭 보고 싶었다.
유명한 작품들은 아예 없었으며, 데생 위주의 그림들도 채워져 있다는 실망스러운 후기들도 읽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사람은 역시 많았다. 매표를 하는 데 줄을 섰고, 관람도 줄을 서서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멈추어 있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염려한 만큼은 아니었다.
고흐는 관심이 많이 가는 화가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 생애 관련 영화를 두세 편 보면서 더욱 관심이 깊어졌다.
유작과 그의 생애, 동생 테오, 그리고 그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은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책을 구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시 소식을 들은 게 먼저인지, 책을 구입한 게 먼저인지 기억이 되지 않는다.
전시는 시기 별, 고흐가 활동한 지역 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1~1885, 네덜란드 시기,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시기이다.
"냐도 무언가가 될 수 있다."
"이제 조금씩 이전에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881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상의 길, 선교사 등 직업을 가졌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해고되는 불운을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고흐의 진실되고 진지한 성격이 현실감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거친 삶을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처지가 더 보였고,
겉의 화려함보다는 본질과 진실에 초점이 가 있었다.
기질적으로 화합이 어려운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실패는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나도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떨어졌던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다.
제1전시장은 초기 인물화 위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웠다. 색이나 인물의 표정도 모두 어두웠다.
이어지는 또 다른 전시구역은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 기간에 그린 데생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 데생도 있었다. 인쇄된 그림을 접했을 때와 느낌이 좀 달랐다.
인쇄로 접하는 그림은 어두컴컴하고 인물들의 표정도 기괴해 보이기도 했었다.
자세히 찬찬히 사람들 표정이 살펴보았다. 무섭지 않고 순응적이고 선해 보였다.
성실하게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독기나 치열함은 없었다.
데생은 섬세함보다는 거친 선들이 눈에 들어왔고 고흐의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선, 터치들, 그리고 어두움과 무거움
1886~1888 파리 시기, 빛의 발견
화사한 점묘화 '식당 내부', 붓 터치가 거친 '자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기는 신인상주의(점묘파)가 새로운 회화 양식으로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빛의 중요성 인식, 색을 두껍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을 터득하면서 개성적 표현으로 그의 작품이 진화해 간다.
임파스토 기법 으로그림을 가까이 볼 때와 거리감을 두고 볼 때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한 면에 꽃병에 꽂은 화려한 정물화나 세 점 있었다.
'들꽃과 장미가 있는 정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1886~1887)
그런데 흐름이 생뚱맞은 느낌도 들었다.
보면서 든 생각은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그린 것은 아닐까? (아비채의 생각)
동생 테오에게 생계와 그림을 위한 지원을 받아 부담감을 무겁게 받고 있었으므로...
그의 꿈은 소박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자신의 생계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버는 것
그래서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 될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왜 생전에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런 현실을 겪은 고흐의 고통이 되돌아온다.
1888-1889 아를 기, 색채의 발견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석양이 버드나무'가 있었다. 그림이 크기가 작은 편이었지만,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씨 부리는 사람'은 태양을 중심으로 붓 터치로 퍼져나가는 황금색 빛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시기에 해바라기 7점을 그렸다고 했는데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을 한 점도 볼 수 없었다.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고갱과 공동생활을 한 시기도 이 시기이며, 화가 인생의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낸 시기이다.
1889~1890 생레미, 자연으로 돌아가라
'슬픔에 잠긴 노인', 블루칼라가 인상적이다. 색채 회화의 완성 시기로 자신만의 독특한 자연의 빛과 형태를 발전시킨 시기
'착한 사마리아인' 등 그림을 통해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 정신병원에 머무는 등 정신적 고통을 작업에 대한 의지로 이겨 낸 시기
붓 터치가 거칠고 강렬하여 회화를 통해 고통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1890 5월 20일 ~70일간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
"나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인간인가"
'젊은 여인의 초상', '의사 가셰' 데생 작품
의사 가세의 보호 아래 라부 여인숙 다락방에서 그림 그리기가 전부였던
반 고흐는 화가로서의 10년 월, 고통과 비운의 삶을 마감하였다.
인류애, 진실, 예술의 의미를 세상에 남기고서....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렸다. '붉은 포도밭' 이다.
영화에서 고흐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무 앞서갔다'
사람들의 공감과 인정을 평생 받지 못하고 사후에 빛을 보게 된
불운의 화가
고흐 생전에 이런 관람객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면...
아니 1000분의 1, 10000분의 1 정도만 공감받았어도 이렇게 마음이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시장에서 울컥, 울컥 올라오는 것은 그의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생애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관람을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아트 삽에서 서서 기념품 판매량을 보면서
'누구를 위한 거지?'
반 고흐, 그의 동생 테오는 어디에...
마음이 답답하면서도 쓸쓸한 것은, 그의 생애가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던,
소박했지만 성실하고 치열하게 그렸던 화가로서 소명과 사명을 다한 반 고흐,
그런 형을 꾸준히 후원하던 동생 테오마저
이 영광을 보지 못한 것이 아프고 슬프게 다가온다.
반 고흐의 작품은, 반 고흐와 동생 테오 사망 후
1892년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네덜란드의 화랑에서 고흐의 그림 전시를 하면서 명성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이 그림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요한나의 일기, 1892. 2.26
1914년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하였다. 고흐의 명성이 올라가 는데 기여하였다./나무위키(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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